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문단 편집) === 전방입소 거부투쟁 시위의 계획 === 1986년 초 성균관대학교의 학생들이 전방입소훈련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서울대학교의 운동권 조직들은 자신들도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서울대학교도 곧 전방입소훈련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대학교의 전방입소훈련 일자는 4월 28일이었다.] 1986년 4월 16일 ''''전방입소훈련전면거부 및 한반도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전방입소거부특위)'''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총학생회장 김지용을, 부위원장에 [[이재호(열사)|이재호]]를 선출했다. 이 단체는 결성되자마자 곧바로 시위를 계획했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전방입소를 거부하는 내용의 홍보를 진행하고 홍보지나 책자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들의 활약으로 서울대의 각 과들과 단과대학들은 서로 전방입소를 반대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고무된 전방입소거부특위는 4월 28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할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학교 측이 4월 28일부터 3일 간의 도서관 휴관을 공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로구 연건캠퍼스 의대 도서관을 농성 장소로 정했고 거사일도 전방입소 전날인 27일로 정하고 지도부는 김세진과 이재호로 정했다. 그러나 두번째 계획도 정보가 노출되어 도서관 앞에 경찰이 진을 치는 바람에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두번째 계획까지 무산되자 그 날 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또 다른 농성 장소를 물색해야 했는데 오랜 토론 끝에 학교와 가까운 신림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던 이정승은 신림사거리에 대하여 "신림 사거리는 전에도 가끔 가두투쟁 장소로 활용됐었죠. 의대 도서관 농성이 불발로 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기 때문에 다시 시내에서 집회를 잡기에는 무리였어요. '''학교와의 근접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시위 날짜는 4월 28일로 정해졌고 세번째 계획의 지도부는 두번째 계획과 동일하게 김세진과 이재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